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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백하건대, 이 글은 한 번의 수정을 거친 글이다. <슈투트가르트의 조신한 청년들>이라는 제목을 듣고, 오늘의 한국에서 ‘조신하다’라는 단어가 가지는 맥락을 생각해봤을 때, 이 작업을 전복에 대한 의미로 읽어내기는 사실 매우 쉬웠다. 여성 작가의 작품이고, 작품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모두 시스젠더 백인 남성으로 보인다는 점, 그리고 이들이 ‘조신하다’라는 말로 수식되는 점에서 이 작업은 서구 남성-동양 여성이라는 이분법적 구도에서 읽혔다. 게다가 전시 장소는 다방이었다. 다방이라는 장소가 어떻게 여성을 억압해왔는지를 떠올릴 때, 이 전시 공간에 가상환경을 통해 남성의 방을 선택해 들어가는 상황이 주어질 때 이는 다분히 여성을 주체의 자리에 놓고, 남성을 객체의 자리에 두는 역전의 상황을 연상시켰다.

  VR 헤드셋을 쓰면, 페이스북 프로필을 연상시키는 정방형의 사진은 5명의 남성의 얼굴과 이름을 지시하고, 우리는 5명의 남성 중 한 명의 방을 선택하게 된다. 하지만 문을 열고 들어간 곳에 펼쳐지는 것은 문 밖에서 기대했던 그런 장면은 아닐 것이다. 시간이 멈춘 방, 남성들은 조신하게 우리를 긴장하며 기다린다기 보다는 편안한 상태로 방 안에 늘어져 있다. 방을 따라 걸음을 옮기면 그 사람이 앉아있던 소파나 방 벽에 붙어 있는 어린 시절의 사진들, 포스터, 그 사람이 그리던 캔버스나 통기타 등 생활감이 느껴지는 물건들이 눈에 들어온다. 눈을 돌리고 걸음을 옮기는 것으로 방 안에 스며든 개인의 시간들을 느끼게 한다. 각각의 방은 현실적인 가상으로 구성되기보다는, 작가의 기억이 덧씌워진 방으로 완성되어 있다. 그렇다면 이것을 단순히 전복의 상황으로만 읽어내는 일이 옳은 일일까? 오히려 이것은 누군가에 대한 새로운 기억의 방식은 아닌가?

  영상과 VR을 관통하는 공통적인 공간은 그들의 방이다. 방은 매우 사적인 공간이고, 편안한 차림으로 평범한 대화를 영상은 인위적이기보단 일상적으로 느껴진다. 이반, 요하네스, 야니스, 플포리안, 요르고와 추수를 이어주는 관계의 끈은 유연하다. 작가가 다섯명의 청년과 경험하는 다양하고도 유사한 일상은 모노가미적인 관계들로는 완전히 이해될 수 없다. 언어가 개인보다 이름을 선명하게 만들 듯, 언어화된 관계로 한정되는 데에서 벗어나 오로지 추수-다섯 청년들만의 고유한 관계를 맺는다.
 

  VR이라는 매체가 갖는 물질-비물질의 경계의 넘나듦은 ‘관계’에 대한 추수의 가치관과 맞물려 우리를 둘러싼 모든 언어적 약속들을 깨트리고 만다. 마치 폐허에 붙은 이름처럼, 안에서 우리의 집단적인 언어화의 병폐를 드러내어 현존에 위협을 가하던 다방에 붙여진 허구의 이름들을 벗겨낸다. 추수의 작업을 통해 우리는 탈언어적 관계의 가능성을 엿본다. 이제 우리를 서 있게 했던 단단한 토대는 사라지고, 거대한 그물과 같이 유연한 지평이 펼쳐진다. 누군가의 일상은 누군가에게 정치가 된다. 하지만 이 정치가 된 이름을 일상의 이름으로 되돌리는 일도 누군가에겐 정치가 된다. 

이지연&김아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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