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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ranger than (Meta-) Fiction

“어느날부터인가 눈 앞에 흰 점이 떠다녔다.”

  조현의 <Stranger than Fiction>은 마치 영화와 영화관의 역사 전반을 참조하는 듯하다. 피카디리나 대한극장 같은 과거의 영화 메카부터 붉은 색 소파로 빼곡하게 채워진 전형적인 멀티플렉스 영화관, 최초의 상업 영화로 꼽히곤 하는 <열차의 도착>부터 <트루먼 쇼> 같은 20세기의 수작들까지. 관람자는 끊임없이 영화관과 영화 사이를 오가며 작가가 수집한 수많은 레퍼런스를 경험하도록 요구된다. 여기서 ‘요구된다’고 말하는 이유는 영상(그리고 영상과 같은 서사를 공유하는 VR)의 초입부터 등장하는 지시문 때문이다.

“문을 찾아 걸어가시오/한 번 뒤에서 닫힌 문은 다시 열리지 않습니다.”

  이로 인해 관람자는 마치 영화 속 등장인물이 되어 자신의 모든 행동을 조종당하는 위치에 놓인다. 작품을 관조하는 제3자에서 작품의 일부로 편입되는, 일인칭의 플레이어가 된 듯한 상황 설정은 서사가 진행됨에 따라 점점 고조된다. 미로 같은 상영관의 문을 열고 닫으며 헤매던 관람자-등장인물-플레이어는 ‘눈 앞의 흰 점(초점)’이 시야를 덮을 만큼 커진 뒤 나타난 미로에서 두 번째 지시문을 마주한다.

“미로의 중앙을 찾아가세요/보이고 들리는 것만을 믿지 마세요”

  ‘왼쪽’, ‘직진’처럼 귓가에 속삭이는 목소리도, 막다른 길인 양 세워진 벽도 믿지 않아야 한다. 결국에는 어떻게든 미로의 중앙에 도착하게 되어 있다. 지시를 거역하는 일마저 지시대로 수행한 행위의 결과일 뿐이다. 이렇게 의도된 혼란과 다중의 레이어 위로 또 한 겹의 레이어가 펼쳐진다. 미로의 중앙에서 관람자를 기다리는 것은 낡은 TV에서 상영되는 <매트릭스>의 명장면이다. 모피어스가 던지는 현실과 가상의 경계에 대한 질문은 오늘날 진부하게 느껴지기까지 한다. 하지만 이 질문이 영화라는 형식을 빌어 등장하고, 이 영화를 차용하는 조현을 통해 이중으로 포장되어 던져질 때 비로소 드러나는 새로운 지점이 존재한다.

  조현의 작품에서, 일인칭의 관람자는 주어진 서사에 맞춰 헐겁게 연결된 공간과 공간 사이를 이동하는 임무를 갖는다. 이 세계가 철저하게 작가가 만든 가상임을 인지한 상태에서 기꺼이 작품의 등장인물이라는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가상 세계에 들어온 관람자에게 보여지는 것은 또 다른 가상, 혹은 ‘가상을 가상으로서 제시하는 가상’이다. 미로의 중앙에서 <매트릭스>를 발견하는 지점으로 돌아가 보자. TV 속 화면과 똑같이 구성된 공간은 순식간에 영화관의 스크린으로 옮겨가고, 여기서 다시 영화 <스페이스 오디세이>를 연상시키는 사막으로 장면의 전환이 이루어진다. 이로써 관람자는 단숨에 이전의 공간에서 추방당한다. 그리고 자신이 이 공간에 속한 존재가 아님을, 더 나아가 이 공간이 가상의 세계 위에 건설된 또 다른 가상임을 자각하게 된다.

  여기서 작품의 제목 <Stranger than Fiction>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는 동명의 영화 제목을 그대로 가져온 것인데, 영화는 주인공이 어느 날 자신이 어떤 소설 속 주인공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서 벌어지는 사건을 코믹하게 다룬다. 이 영화와, 작품에 또 다른 레퍼런스로 등장하는 <트루먼 쇼>는 넓은 의미에서 메타픽션의 범주에 속한다는 공통점 때문에 자주 엮어서 논의되곤 한다. 픽션 속의 픽션이라는 구조가 갖는 힘은 그것이 보는 이로 하여금 현실과 가상의 경계에 의문을 갖게 한다는 데 있다. 그렇다면 조현의 작품은 이 의문에 대한 일종의 오마주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가상과 현실이 헐겁게나마 연결되어 버린 오늘날, 영화를 계승하는 가상현실은 이것이 더 이상 순진한 의문으로 남을 수 없음을 폭로하고 있다.

김륜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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